영화 '순정',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사랑
'아, 이래서 그렇게 보고 싶었구나!'
영화 '순정'은 이런 느낌이었다. 비록 컴퓨터에서 보느라 작은 화면이었지만, 순수한 아름다움이 담긴 영화에 대한 감동은 덜하지 않았다.
개봉 당시에는 평점에 비해 관객이 적은 것 같아 취향을 타는 영화일 거라 생각했다. 그렇더라도, 지난 2월, 3월 영화가 극장에 걸려 있을 때 보고 싶었다. 예고편에서 본 배우들의 그을린 얼굴과 옛 풍경 때문이었다. 극장 몇 군데의 시간을 알아봤지만 맞는 시간이 없어 보지 못 했다.
수옥 "영화는 됐고야, 큰소리로 음악이나 실컷 듣고 잡다."
범실 "내가 델꼬 갈게."
수옥 "말이라도 달다."
(영화 '순정' 예고편, 배경 음악 : 캔자스 'Dust In The Wind')
(영화 '순정' 예고편, 배경 음악 : 무한궤도 '여름이야기')
영화는 라디오 DJ 박형준이 한 통의 사연을 읽어주다 낯익은 이름을 발견하고는 23년 전 과거를 회상하면서 시작한다.
1991년 전남 고흥의 한 섬마을에는 범실, 개덕, 길자, 산돌 그리고 다리가 불편한 수옥 이렇게 열일곱 다섯 동갑내기들이 있다. 육지의 학교가 여름방학을 하자 아이들은 배를 타고 섬으로 돌아온다. 마중나와 선 수옥을 보자 아이들은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고 배가 부두에 닿기도 전에 바다로 뛰어든다. 그 정도로 단짝친구들이다.
해맑게 어울리는 아이들, 다리가 불편해도 티끌 없이 사귀고,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순정을 간직한 아이들은 바다와 섬마을의 청명함을 배경으로 한 폭의 움직이는 그림 같다.
길자 "(삶은 닭다리를 들이밀며) 묵어! 자고로 남의 살이 들어가야 기운을 쓰는 거여."
며칠 전에 꿈을 꾸었다. 어릴 적 친구를 만나 반가운 마음과 함께 동네를 한 바퀴 산책했다. 친구들의 안부를 주고받다가 오랫동안 궁금한 것을 물었다. 스무 살 때쯤 세상을 떠난 친구에 대해서였다. 오래 지난 후에 들은 소식이라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달리 총명하던 친구였기에 놀라움은 컸고, 펼치지 못한 꿈이 있었을 것 같아 안타까움도 컸다. 그 친구의 찰랑이던 머릿결이 한동안 가슴을 맴돌았다.
(어른) 개덕 "그거 벨호라. 별호, 별명이여.
개덕이는 볕받은 강아지 마냥 요래요래 귀염떤다고 그라고 부르고,
산돌이는 날래게 쏘다닌다고 붙인 거고.
동네사람들 다 어른, 아이 원래 이름 놔두고 별호를 불렀어라."
영화는 마냥 아름다운 장면으로만 가득찰 것 같더니 한 친구를 잃는다는 반전을 보여 준다. 친구가 죽기 전 아이들은 크게 다투었고 마지막까지 화해하지 못했다. 장례를 치르며 서로, 또 자신을 탓하며 울부짖을 정도로 그 일은 마음에 응어리로 남게 된다. 과거를 회상하며 천천히 헤드폰을 벗는 어른 범실 박형준의 눈꺼풀에 매달린 눈물 방울은 23년이 지나서도 먹먹한 범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영화 속 친구의 죽음이 며칠 전 꿈에서 물었던 죽은 친구를 떠올리게 해서 나도 먹먹해질 뻔했다.
범실 "나가 지켜줄 거여.
평생 나가 니 곁에서 지켜줄 거여."
친구의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던 산돌이 결심한 듯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고 범실에게 달려 간다. 산돌이 마지막 선곡 음악이라며 건넨 것은 바로 라디오 DJ가 꿈이었던 죽은 친구의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였다. 테이프 겉표지에 빨간색으로 적혀 있는 친구의 메모에 전하지 못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범실은 오열한다.
수옥 "니가 없다고 생각만 해도 여기가, 너무 아퍼.
생각만 해도 이리 아픈디, 참말 그라믄 난, 난..."
범실이 친구의 마음을 알게 되는 장면은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러브레터'에서 여자 후지이 이쯔끼가 뒤늦게 소년 후지이 이쯔기의 짝사랑을 알게 되는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비슷한 듯 다른 점은 소년 혼자 짝사랑했던 '러브레터'와 달리 '순정'에서는 범실 역시 그 친구를 짝사랑했었던 것이다.
수옥 "가장 아팠던 때, 그럼에도 가장 빛나던, 그래서 미치도록 그리운 그 날.
우리에게 오늘은 항상 그런 날이 아닐까요?
내일보다 더 예쁘고, 내일보다 더 어리고, 내일보다 더 용감할 수 있는 오늘.
전하지 못한 말들이 있다면 전해보는 건 어떨까요?
저도 용기를 내서 전하려고요. 그 고마움을, 그 그리움을.
보고 싶은 친구들에게, 보고 싶은 너에게."
(영화 '순정', 출처 : 다음 '순정' 영화 사이트)
이 영화에는 양념이 있다.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배경 음악인 캔자스의 'Dust In the Wind'는 영화를 잘 이끌어 준다. 듣는 순간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또한, 낯익은 배우들이 재미를 더한다. 2013년 KBS 드라마 '힘내요 미스터 김'에서 리철용으로 나왔던 연준석은 어린 아이들도 철용이 철용이라고 해서 드라마를 보지 않았어도 이름 만은 기억하게 되었는데 영화에서 보니 반가웠다. 영화 '동주'에서 송몽규 역으로 인상 깊었던 박정민, 2012년 SBS 드라마 '대풍수'에서 어린 지상 역으로 연기 잘한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이다윗, 2014년 MBC '왔다! 장보리'에서 사투리 연기를 너무 잘해서 기억에 남았던 황영희, 그 밖에 두말하면 잔소리인 황석정까지.
사랑을 들이고 정성을 기울인 것이 만족스런 것을 만들어 냈을 때는 봐도 봐도 또 보고 싶어진다. 영화 '순정'을 보는 내내, 만든 사람들은 얼마나 이 영화가 예쁠까, 닳도록 보고 싶을 것 같았다. 순정(純情)을 주제로 이렇게 아름답고 깨끗하면서도 아련하고 그리움 가득하게 그려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마치 누구나 꿈꿀 수는 있지만 아무나 순정을 주고받을 수 없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