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나무 1 뿌리깊은 나무 1 10점
  




나면서부터 공기로 숨을 쉬지만 그 고마움을 알지 못하듯, 글을 배우면서부터 한글을 쓰지만 그 위대한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연찮게 접한「뿌리깊은 나무」는 한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읽어보아야 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여 년을 살았지만 근처에 세종대왕기념관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도심같지 않게 수풀이 우거지고 빨간 장미가 만발한 길고 높은 돌담 너머가 궁금해 그 출입문을 찾아보니 세종대왕기념관이었습니다. 왠지 부끄러운 마음에 며칠 뒤 기념관에 들르기로 하며 세종대왕 관련책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렇게 만나게 된 이정명 작가의「뿌리깊은 나무」. 한마디로 감동이었습니다.

'훈민정음을 둘러싼 음모'를 미끼로 던지며 책을 집어들게 한 소개문구는 최근 읽었던 몇 권의 역사소설의 영향으로 충분히 제 흥미를 끌었습니다. 어렸다면,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왕'이니까 새글을 만들고 알리는 데 어려움 따위는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컸기에, 정치가 복잡하고 대통령의 자리도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고, 조선시대의 왕도 고뇌가 많았을 것이라 짐작하게 됩니다. 

조선의 왕인 세종대왕, 후세대가 두루 혜택받고 있는 우리말 한글. 세종이 한글을 온전한 글자로 반포하기까지 조선 정계의 알력싸움이 얼마나 컸을까 생생하게 그려낸 것이 바로 소설「뿌리깊은 나무」입니다.

살인사건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처음부터 읽는 이를 몰입하게 만듭니다. 이어지는 연쇄살인과 단서들, 사건을 풀어가는 이의 고뇌와 비밀을 간직한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 뒤늦게 등장한 세종에 대한 멋진 묘사, 그림과 금서에 숨겨진 실마리, 벙어리 무수리와 마방진, 오행을 통한 한글의 우수성 표현, 시체해부에 대한 과학적 설명, 악한 줄 알았던 이의 진실, 사건의 반전 등이 집현전 학자들의 희생을 중심으로 이어집니다.

책의 중반을 넘어서면서 사건이 점점 왕 세종을 향해 진행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2권 중반에서는 급기야 소름이 끼치면서 저도 모르게 "훈민정음"을 소리 내었습니다. 뒤에 남은 내용이 무엇인지 몰라도, '앞으로 거북의 등에 새겨질 글자'가 세종대왕께서 제위 25년 47세에 창제 반포하신 훈민정음일 것이라 짐작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사건의 핵심 도구인 고군통서를 통해 알 수 있는 세종대왕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 훈민정음을 만들어 어리석은 백성을 깨쳐야 한다는 측은지심은 조정 반대세력의 음모에도 맞설 만큼 강하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중국의 문자와 나랏말은 본디 다른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 중국의 문자로 우리말을 쓰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나랏말에는 그 말을 쓰기에 적합한 나랏글이 있어야 한다."
 "나랏글이라면 어떤 글자이옵니까?"
 "소리가 주인이 되는 글자다. 사람의 소리를 정확하게 쓸 수만 있다면 수만 글자를 일일이 익히지 않고도 얼마든지 뜻이 통할지니…."
 오래전부터 말과 글에 대한 주상의 곰삭은 생각이었다.

- 2권 177쪽 -

책에는 세종 시대의 번성했던 농업과 과학, 문화, 북방 정벌, 화폐유통, 토지개혁 등의 이야기도 등장합니다. 백성의 살림을 걱정해 상에 고기를 금하고 푸성귀로 했던 세종의 진정한 마음, 임금의 안위를 걱정해 마방진의 원리로 침소를 만든 신하의 마음, 아름다운 여인을 향한 젊은 마음 등은 책을 읽는 소소한 재미입니다. 사건 해결에서 간혹 전개가 뛰어넘는 듯한 느낌을 받지만, 전반적으로 탄탄하게 구성되어 있기에 그런 것은 흠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을 토대로 만든 책이니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작가가 제시하는 책 속의 증거라든가, "나랏말 싸미 듕국에 달아 문짜와로 서로 사맛디 아니할쌔…"로 시작하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훈민정음의 창제 의의로 미루어 보아, 세종대왕은 진정 위대한 왕이었을 것입니다.
 
백성을 제몸처럼 생각하는 왕이 있고, 한 명 한 명 뿌리깊은 나무라 일컬어지는 학자가 있는 책「뿌리깊은 나무」. 세종대왕의 흔적을 따라가다 우연히 만난 이 책이 오랫동안 감동으로 남아, 세종시대에 영상기록 장치가 없었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며 상상으로 대왕의 모습을 그려보곤 합니다.
 
덧붙여, 이렇게 좋은 소재가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였더니, 내년에 드라마로 만나볼 수 있다고 합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모습의 배우가 세종의 역할을 맡기를 간절히 바라며 책감상을 마칩니다.

2010/06/21 - [ 스승이자 나의 벗, 책] - 훈민정음체의 거룩한 비밀
2010/06/21 - [ 스승이자 나의 벗, 책] - 청소년 이후 세대를 위한 세종대왕 위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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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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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작은 연못 가운데 초라한 정자였으나 수많은 크고 웅장한 전각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넓은 궁궐의 모든 건축물들과 풍경을 모두 거느린 듯했다. - 이정명 '뿌리깊은 나무' 2권 188쪽 (경복궁 향원지 취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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