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의 비밀훈민정음의 비밀 -세자빈 봉씨 살인사건-8점




세종대왕 관련 책을 찾다가 훈민정음에 비밀이 있다는 제목을 보고 뽑아든 책이 「훈민정음의 비밀 -세자빈 봉씨의 살인사건」이다. 세자빈이라 하여 세종대왕의 빈인 줄 알았는데, 세종의 아들이며 다음 대의 왕인 문종의 세자시절 맞이한 두번째 부인을 말한 것이었다. 문종에게는 세 명의 빈이 있었는데 그 내막은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이 책은 목적이 뚜렷한 책이다. 목적없이 지어진 책을 찾아보기 힘들겠지만, 그만큼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며, 그것을 위해 썼다고 작가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목적은 한글을 쓰는 모든 사람에게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책에서 전개되는 폐세자빈의 저주에서 시작된다고 알려진 살인사건의 겉모습은 훈민정음의 제자해 순서에 따른 것이었다. 제자해란, 훈민정음의 과학적인 제작 원리를 밝힌 것으로, 우리가 1527년 이후에 쓰고 있는 한글 순서 'ㄱㄴㄷㄹㅁㅂㅅㅇ'가 아닌, 소리 체계의 순서인 'ㄱㄴㅁㅅㅇ'을 기본으로 한 'ㄱㅋㄴㄷㅌㅁㅂㅍㅅㅈㅊㅇ?ㅎ?ㄹ△'의 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책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이 바로 이 순서에 따른 것이다.(앞의 '?' 글자는 ㅡ아래에 ㅇ, 뒤의 '?'은 ㅣ아래에 ㅇ인 모양이다. 지금은 없는 말이라 쓸 수 없었다)

작가의 목적이란 바로 이 부분에서 비롯된다.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원리로 만들어진 언어라고 칭송받고 있지만, 정작 한글을 쓰는 사람은 그 원리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한글의 순서가 1527년 이후 뒤바뀌어서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과학적인 소리체계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세종대왕의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훈민정음 창제의 뜻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하여 그 소리체계의 제대로 된 순서와 원리를 설명하고, 훈민정음에 담긴 세종대왕의 거룩한 뜻을 전하려 한다.

주고받는 답장이 있는 편지글 형식이지만, 신기하게도 사건이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다. 처음 이런 형식을 접한 독자는 지루하게 느낄 수 있다. 모두 말로서 사건을 '설명'하게 되니 긴장감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의 사건과 추리과정은 반전과 함께 충분히 흥미로우니 끝까지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된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문종에게 세 명의 빈이 있었고 세 번째 빈은 단종을 낳은 다음날 다량출혈로 죽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두 번째 빈인 봉씨가 대식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대식이란 궁녀들의 동성연애를 뜻하는데, 세자빈 봉씨는 대식관계의 궁녀들을 모아 모임을 만들어 함께 어울렸다고 한다.

이정명의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세자빈 봉씨의 폐위 원인이 정권다툼의 과정에서 음해된 거짓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였고, 세종대왕 실록의 기록에는 '지극히 추잡한 일' 이라며 세종이 교지에 적는 것조차 금했다고 하니, 먼 후세대이자 단순한 독자로서는 진위여부를 알 길이 없다. 다만, 이 책에서 묘사하는 집단대식관계는 좀 과장된 게 아닌가 싶다. 궁녀 집단 거의 전체가 대식 관계라니, 쉽게 믿을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작가 또한 서문에서 '상상력이 지배하는' 소설임을 밝혔으니, 진지하게 따져볼 필요는 없겠다.

책에서 주고받는 편지를 통해서도 사건의 궁금증은 충분히 커진다. 사건의 주도자가 책의 끝에서 추측가능케 언급되지만, 사건 해결과정에서 의심받는 인물과 누명이 밝혀지면서 되려 그 인물이 알고도 희생한 것임을 알았을 때 이 책을 끝까지 읽은 보람을 느꼈다 . 한글의 아름다움과 세종대왕의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도 있는데, 감동을 아니 받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어미가 이런 말을 했습네다. 훈민정음은 어미와 자식을 합한 글자하는 것입네다. 어미의 등에 아들이 업히거나 어미의 손에 아들이 매달리는 형상이라고 하였습네다. '가 '는 어미 글자인 모음 'ㅏ'에 아들 글자인 'ㄱ'을 안고 있는 모습이라고 했습죠. '강'은 어미 글자 모음 'ㅏ'가 아들 글자 'ㄱ'을 안고 딸 'ㅇ'을 손에 잡고 있는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 162쪽 -


"- 주상 전하가 장원 이개에게 내린 훈민정음 -
이는 내가 어린 백성을 위해 내리는 훈민복음이니, 이 글을 필사하여 전하는 자마다 복을 받고, 그 복음을 받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다. 훈민복음이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훈민복음을 받은 자가 똑같이 필사하여 다른 이에게 보내도록 한다. 받은 즉시 효과가 있을 것이고, 사람들에게 많이 보낼수록 보내는 이는 더 많은 복을 받게 될 것이다."
- 164쪽 -


"과인이 훈민정음의 글씨체를 이전에 있던 글씨체로 하지 않은 데에는 깊은 뜻이 있었다 . 글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농민, 갖바치, 백정, 푸주한, 비부장이들이 어떻게 무슨 무슨 체를 흉내낼 수 있으며, 벼루나 먹, 목판이나 종이를 어디서 구할 수 있겠는가. 매일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 백성들이 언제 여가가 생겨 한가하게 글을 배울 수 있겠는가.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훈민정음 글씨체였다.
이는 양반들이 붓으로 쓰는 모필체가 아니라 지게꾼이 지게를 지고 가다가 쉬면서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로 땅에 그을 수 있는 글자체이고, 음식을 나르던 아낙이 사금파리로 땅에 쓸 수 있는 글자체이고, 밭을 매던 소녀가 호미로도 쓸 수 있는 글자체이다. 막대기체라 해도 되고 호미체라 해도 되고 사금파리체라 해도 된다. 아예 손가락으로 허공에 그어도 되니 손가락체라고 불러도 좋다.
이것이 바로 백성의 삶과 생명을 이어주는 훈민정음체이다. 두드러지고 모가 난 각체이다. 이 각체에는 어린 백성들이 글을 배우기를 바라는 과인의 진심어린 노력과 뜻이 들어 있다."
- 320쪽 -


'훈민정음의 비밀'이 중요한 사건을 뜻하겠거니 했는데, 세종대왕의 거룩한 뜻을 말하는 것이었으며 사건해결을 위한 중요한 풀이법이기도 했다. 세종대왕 관련 책은 그 형식이나 장르가 달라도 하나같이 읽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주는 것 같다. 왕으로서 치우침이 없는 분이셨기에 그럴 것이다. 단일민족으로 세종대왕의 기상이 후세에도 이어지고 나타나길 바라며, 또다른 책도 찾아보자 생각한다.

2010/06/21 - [ 스승이자 나의 벗, 책] - 청소년 이후 세대를 위한 세종대왕 위인전
2010/06/14 - [ 스승이자 나의 벗, 책] - 감사하는 마음과 감동으로 읽은 소설「뿌리깊은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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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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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작은 연못 가운데 초라한 정자였으나 수많은 크고 웅장한 전각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넓은 궁궐의 모든 건축물들과 풍경을 모두 거느린 듯했다. - 이정명 '뿌리깊은 나무' 2권 188쪽 (경복궁 향원지 취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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